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리랑카 내전 (문단 편집) == [[인도군]] 철수 이후 == [[파일:external/static-secure.guim.co.uk/Young-Tamil-Tiger-rebels--011.jpg]] ▲ 1991년에 촬영한 LTTE 반군 병사들. 그러나 인도는 철수 과정에서 인도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스리랑카 북동부 지역의 군대 주둔권과 치안권을 스리랑카 정부에게 넘기지 않은 채 급히 스리랑카에서 철수해 버렸고 결국 인도군이 떠나고 난 스리랑카 북, 동부 지역은 공백 상태에 빠졌다. 한편 인도가 스리랑카에서 철수하자 이에 LTTE는 공백 상태에 빠진 스리랑카 북, 동부 지역을 재빠르게 점령했고 스리랑카 정부군과 전투를 재개하면서 스리랑카는 다시금 내전이 벌어졌다. 이에 스리랑카 정부군은 LTTE 진압 작전을 벌였고 LTTE 역시 스리랑카 정부군에 맞서 완강하게 저항하면서 스리랑카는 정부군과 LTTE 반군 간 전투와 상호 간 학살로 얼룩지기 시작했다. 한편 정부군과의 내전 기간 동안 LTTE는 [[1987년]] 인도의 스리랑카 내전 개입을 결정한 [[라지브 간디]] 인도 총리를 [[1991년]] 총선거 유세차 [[타밀나두]]에 왔을때 자살 폭탄 테러로 암살하고 1993년에는 노동절 행사에 참석했던 라나싱헤 프레마다사 스리랑카 대통령을 자살 폭탄 테러로 암살하는가 하면 [[1999년]]에는 [[찬드리카 쿠마라퉁가]] 5대 대통령에도 자살 폭탄 테러를 감행해 중상을 입히고 여러 유력 정치 인사들을 암살하는 등 LTTE는 일개 반군 조직에서 벗어나 폭탄 테러와 암살도 서슴치 않는 악명 높은 [[테러리스트]]로 전 세계적인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파일:external/www.tamileelamnews.com/ltte_sea_tiger_boats_01_001.jpg]] LTTE 해군인 Sea Tigers [[파일:external/www.eelamview.com/LTTE-leader-with-Tiger-commanders-with-air-tigers-7.jpg]] LTTE 공군인 Air Tigers 그러던 [[1991년]] [[12월 25일]] LTTE에게 큰 위기가 닥쳐왔다. [[1976년]] 결성과 더불어 LTTE에게 지원을 해 주던 [[소련]]이 [[소련 해체|붕괴]]되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TTE는 인도 타밀족들의 자금 지원 하에 어렵게나마 세력을 유지하였고 심지어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등 해외에 거주하는 타밀족 이민자들의 자금 원조도 받아 내었다. 인도 타밀족들과 기타 해외 거주 타밀족 이민자들의 지속적인 자금 지원으로 LTTE는 정부군과의 군사력 전력 차이를 어느 정도 극복했다. 심지어는 단순한 반정부 게릴라 저항 단체 수준에서 벗어나 '''육군, [[공군]], [[해군]], 정규군, [[민병대]]까지 갖춘 어마어마한 규모의 무장 단체로 재탄생되었다'''. 그러다보니 LTTE는 세계 역사상 '''가장 강한 무장 단체로 등록되기까지 했다'''. 1990년대 초반에는 스리랑카 해군과 LTTE 해군 고속정 간 '''[[해전]](!)'''을 벌여 스리랑카 해군 [[초계함]]이 격침당하는 일까지 있었다. 특히 LTTE의 해군인 "Sea Tigers"는 스리랑카 해군과의 해전에서 '''스리랑카 해군 전력의 3분의 1을 격침시켰고''' 공군인 "Air Tigers"의 경비행기, 무인기, 전투 헬기는 '''스리랑카 공군 기지를 공습하여 큰 피해를 주어''' 스리랑카 전체를 충공깽에 빠뜨릴 정도였다. 한편 LTTE가 폭탄 테러, 게릴라전, 제한적인 정규전 등으로 완강하게 저항할 정도로 정부군을 위협하자 다급해진 스리랑카 정부는 상당수 국가 예산을 전쟁 비용으로 들여가며 [[미국]], [[이스라엘]], [[러시아]], [[우크라이나]], [[아르헨티나]], [[중국]], [[파키스탄]] 등 수많은 나라에서 무기들을 대거 도입해 정부군 전력 강화에 나섰다. 한편 LTTE도 이에 뒤질세라 스리랑카 북, 동부 반군 점령지에서 어린 아이들을 [[소년병]]으로 강제 징집시켜 부족한 반군 병력을 채웠고 점령지 타밀족 주민들에게도 치밀한 세뇌 교육과 총기 제공 등으로 이들을 반군의 구성원으로 확보하는 등 군사력을 더욱 강화해 나가며 정부군에게 항거했다. 내전은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기에 들어서면서 격렬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스리랑카의 내전을 해결하고자 LTTE 반군과 스리랑카 정부 간 평화 협상도 진행되었으나 대부분 입장 차이로 협상은 결렬을 반복했다. 하지만 결렬에 결렬을 반복하던 터에 기나긴 전쟁에 LTTE 반군은 극심하게 과격해져 이젠 중립을 지키던 [[기독교]]나 [[이슬람]] 교인들에게까지 공격을 퍼붓는 사태가 터지면서 전세가 역전이 되고 만다. LTTE 반군은 1998년 [[무슬림]]이 다수 살고 있는 바티칼로아 주가 원래 타밀족 땅이라고 공격하여 비무장 무슬림 116명을 학살해버리고 다른 지역에서는 연이어 기독교인에게도 테러를 가하면서 여론적으로 증오를 받고 고립되게 된다. 당연히 아랍권을 비롯한 이슬람 나라들이나 해외 기독교계에서도 종교탄압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덕분에 중립을 지키던 이들도 살기위해서라도 스리랑카군을 돕거나 이들에게 공격받거나 학살당한 피해자 유족들은 분노해 아예 스리랑카군으로 입대하여 싸우기에 이른다. 즉, 스스로 화를 자초한 셈이다. 나아가 내전을 반대하는 '''동족 타밀인'''까지 마구 죽이거나 테러를 가하기 시작한다. 즉 아군 아니면 무조건 적이라는 극단적 논리를 보이고 만 것. 이러한 타밀 반군에 대하여 같은 타밀족이지만 테러범이라고 비난하던 타밀족 국회의원인 더글라스 데바난다까지 암살을 시도했다. 하지만 데바난다는 위에 서술한 1983년 타밀인 학살에 대한 엄중한 조사 및 처벌을 주장하며 스리랑카 측도 이 내전과 테러에 문제가 있다고 중립적으로 대하던 사람이었다. 테러를 당한 데바난다는 겨우 목숨을 구했지만 이 일 이후, 노골적으로 LTTE을 증오하여 강경파가 되었고 스리랑카군이 벌이는 맹공세에 지지하는 의견으로 돌아섰다. [include(틀:관련 문서, top1=반다라나이케 국제공항 습격 사건)] 그래도, 이런 어려움 속에서 2001년 7월, LTTE는 콜롬보 국제공항을 습격하여 국영 항공기 4대를 불태우기에 이른다.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지만 이 일로 스리랑카 최대 국제공항까지 이런 게 드러나 관광객이 뚝 줄어든 건 당연했다. 반대로 스리랑카 여론은 최대 국제공항까지 참 잘도 쉽게 뚫린다고 신나게 욕하면서 분개한 정부군은 LTTE를 가만두지 않겠다며 반격한다. 이렇게 내전이 극렬해지면서도 스리랑카의 스리랑카 정부와 LTTE 반군 간 평화협상은 2002년 [[노르웨이]]의 중재 하에 새로운 협상이 시작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LTTE는 타밀족의 피해가 막심하다보니 정부와의 협상 과정에서 타밀족 분리 독립 입장을 포기하겠다는 입장을 내비쳤고 동시에 반군의 무장 해제와 제한적인 자치권이라도 받아들이겠다며 결성 초기 내걸었던 분리 독립 노선을 포기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LTTE의 무장 해제와 스리랑카 국내 타밀족 자치 정부 수립 등을 골자로 하는 휴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내전은 사실상 종료되었다. 그러나 노르웨이 등 외부 국가들의 중재 하에 휴전 협정이 맺어졌음에도 불구하고 LTTE는 휴전 협정의 내용대로 무장 해제를 준수하지 않았다. 거기다 스리랑카 정부 역시 LTTE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휴전에 합의하면서 약속했던 타밀족 자치 정부 수립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거기다 휴전 와중에도 정부군과 LTTE는 서로를 꺾기 위해 군사력을 증강하였고 가끔씩 정부군과 LTTE 반군끼리 총격전이 벌어지는 등 내전이 재발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